식품이 오프라인 리테일의 핵심 콘텐츠로 떠오르고 있다. 파리의 프리미엄 그로서리 라 그랑드 에피세리 드 파리와 하우스오브신세계 청담의 트웰브, 고메이494 한남, 신세계 강남점 식품관, 롯데 레피세리, SSG닷컴 미식관을 비교하면 미래형 식품 플랫폼의 경쟁력이 단순한 상품 구색이 아니라 편집력과 제조 역량, 독점 상품, 브랜드의 세계관에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가격 비교가 일상화된 이커머스 환경에서 식품 매장의 경쟁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상품을 무한정 늘어놓기보다 어떤 기준으로 골랐는지를 설명하고, 생산과 조리 과정을 직접 경험하게 하는 공간이 주목받는다. 패션과 잡화는 온라인 판매와 병행수입, 리셀 플랫폼의 확대로 유통 채널별 상품 차별성이 약해졌다. 반면 식품은 산지와 장인, 계절, 향과 맛처럼 디지털 화면만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요소를 지닌다.
이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프랑스 파리 르 봉 마르셰가 운영하는 프리미엄 식료품점 '라 그랑드 에피세리 드 파리'다.
라 그랑드 에피세리, 부속 식품관에서 미식 목적지로
라 그랑드 에피세리의 역사는 1923년 르 봉 마르셰 리브 고쉬 1층에 문을 연 고급 식료품 매장에서 시작된다. 현재는 르 봉 마르셰 본관과 인접한 별도의 건물에서 운영되고 있다.
파리 르 봉 마르셰가 운영하는 프리미엄 식료품점 '라 그랑드 에피세리 드 파리'
기업의 소유 구조가 바뀐 것은 1984년이다. 당시 베르나르 아르노가 르 봉 마르셰와 크리스찬 디올 등을 보유하고 있던 부삭·아가슈 계열 기업집단을 인수했다. 이후 아르노가 LVMH의 지배권을 확보하면서 르 봉 마르셰와 라 그랑드 에피세리는 오늘날 LVMH의 선택적 유통 사업군에 속하게 됐다. 따라서 1984년 인수와 LVMH 편입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것보다 두 단계의 과정으로 구분하는 편이 정확하다.
라 그랑드 에피세리는 18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2013년 12월 대규모로 재단장했다. 이때 전통 시장을 연상시키는 '플라스 뒤 마르셰', 지하 와인 셀러, 레스토랑 '라 타블', 확대된 제조 시설이 하나의 공간 안에 통합됐다. 고급 식료품 판매와 현장 제조, 외식, 체험을 결합한 오늘날의 럭셔리 그로서리 모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리뉴얼이었다. 2017년 11월에는 파시 지역에 리브 드루아트 매장을 열어 파리 좌안에서 우안으로 브랜드를 확장했다. 이 매장 역시 식료품 판매뿐 아니라 시식 공간과 레스토랑을 결합해 식품을 하나의 문화적 경험으로 제시했다.
LVMH가 제시한 주요 운영 수치에 따르면 리브 고쉬 매장은 약 3,650㎡의 상업 공간을 갖추고 하루 약 8,000명이 방문한다. 전체 근무 인력은 390명이며 이 가운데 62명이 장인으로 소개돼 있다. 지하 약 1,500㎡의 생산 공간에서는 제빵과 제과, 케이터링 분야의 장인과 전문 견습생이 제품을 직접 만든다. 매장 뒤편에 단순한 물류창고가 아니라 브랜드 고유의 상품을 생산하는 '미식 공방'이 자리 잡은 셈이다.
식품관이 아니라 제조·편집·서비스 통합 모델
이 구조는 일반적인 백화점 식품관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통적인 식품관은 여러 외부 브랜드에 매장을 제공하고 판매수수료나 임대료를 받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상품의 개발과 생산, 브랜드 관리도 입점업체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라 그랑드 에피세리는 상품을 발굴하는 바이어, 제품을 만드는 장인, 음식을 조리하는 셰프, 이야기를 전달하는 콘텐츠, 온·오프라인 판매 채널을 하나의 브랜드 안에 통합한다.
특히 제조 조직은 단순한 시연 시설이 아니다. 상품의 레시피와 품질 규격, 생산 일정, 출시 시기와 판매 채널을 직접 통제하는 공급망 자산이다. 외부 유명 브랜드에 의존하는 식품관은 해당 브랜드가 다른 유통 채널로 이동하거나 경쟁사에도 입점하면 차별성을 잃을 수 있다. 반면 자체 제조 상품과 PB는 해당 플랫폼에 남는 독점 자산이 된다.
현장 제조는 오프라인에서만 제공할 수 있는 콘텐츠이기도 하다. 소비자는 빵과 디저트, 즉석조리 상품의 완성품만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기술과 과정까지 경험한다. 식품 제조에 필요한 인력과 공간이 비용 요소인 동시에 고객을 끌어들이는 공연장 역할을 하는 것이다.
라 그랑드 에피세리는 루프톱 허브 정원과 요리 수업을 연결하고, 제과 공방에서 초콜릿과 디저트를 직접 만들어보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상품 판매, 외식, 교육과 이벤트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고객 여정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상품 수보다 중요한 것은 '선택의 권위'
라 그랑드 에피세리는 와인과 주류, 치즈, 육가공품, 신선식품, 향신료, 오일, 소스, 제과, 차와 커피 등 약 3만 종의 상품을 취급한다. 일부는 매장에서만 판매되거나 현장에서 직접 생산된다.
그러나 규모만 놓고 보면 대형마트와 이커머스 플랫폼이 더 많은 상품을 제공할 수 있다. 이 매장의 진짜 자산은 "왜 이 상품이 이곳에 들어왔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큐레이션 능력이다.
제품 전문가들은 프랑스 각지와 해외 산지를 찾아다니며 상품을 발굴한다. 매장에서는 상품을 단순한 원산지나 가격대가 아니라 계절과 산지, 조리법과 문화적 배경을 기준으로 다시 구성한다. 고객은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이 검증하고 해석한 선택지를 제안받는다.
상품이 너무 많아 선택 자체가 피로해진 시대에는 가장 싼 곳보다 실패하지 않게 골라주는 곳의 가치가 커진다. 라 그랑드 에피세리는 이 선택의 신뢰를 브랜드 자산으로 축적해 왔다.
이러한 신뢰는 PB로 전환된다. 라 그랑드 에피세리의 PB는 유명 제조사 제품보다 저렴한 대체품에 그치지 않는다. 매장이 구축한 산지 네트워크와 품질 기준, 조리 경험을 하나의 상품에 압축한 결과물이다. 쉽게 말해 매장의 세계관을 집으로 가져갈 수 있게 만든 '먹을 수 있는 브랜드 경험'이다.
현대백화점, 온라인에서 먼저 라 그랑드 에피세리를 소개하다
2026년 3월 현대백화점은 라 그랑드 에피세리와 미식 트렌드 교류 및 공동 마케팅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라 그랑드 에피세리가 아시아 지역 백화점과 글로벌 파트너십을 체결한 첫 사례라는 것이 양사의 설명이다.
협력 대상에는 프랑스 각지의 미식 장인들과 개발한 올리브유, 잼, 소스 등 PB 약 300종과 현지 식료품이 포함됐다. 현대백화점은 이를 포함한 상품 약 400종을 온라인과 주요 점포 식품관에서 단계적으로 판매하고, 프랑스 식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체험형 행사도 검토하기로 했다.
현대백화점은 2026년 4월 프리미엄 큐레이션 온라인몰 '더현대 하이'에서 라 그랑드 에피세리 PB와 유럽 프리미엄 식료품 약 300종을 먼저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운영 품목을 약 400종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상설 오프라인 매장을 먼저 열기보다 현대백화점의 디지털 채널을 초기 고객 접점으로 선택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사례는 미래형 식품 플랫폼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동일한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오프라인은 시식과 발견, 제조, 체험을 담당하고, 온라인은 재구매와 개인화, 장기적인 고객 관계를 담당하면 된다.
국내에도 유사한 시도는 있다 — 다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국내에서도 식품을 핵심 콘텐츠로 삼는 시도가 빠르게 늘고 있다. 그러나 백화점 지하 식품관을 고도화한 사례는 많아도, 라 그랑드 에피세리처럼 식품 자체가 방문 목적이 되고 제조 조직과 PB, 외식, 교육, 온라인 채널까지 통합된 독립형 플랫폼은 아직 제한적이다.
가장 가까운 사례, 하우스오브신세계 청담 '트웰브'
2025년 12월 10일 문을 연 하우스오브신세계 청담은 기존 SSG푸드마켓 청담점의 지하 1층과 지상 1층을 약 1,500평 규모의 체류형 리테일 공간으로 재구성한 사례다. 신세계가 하우스오브신세계 모델을 백화점 외부의 독립 공간으로 확장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우스오브신세계 청담 — 지하 1층 식품관 '트웰브'가 핵심 콘텐츠다
핵심은 지하 1층 식품관 '트웰브'다. 약 6,000종의 웰니스 그로서리를 12가지 기준으로 큐레이션하고, 약 40종의 스무디와 주스, 약 900가지 조합이 가능한 맞춤형 델리 플레이트를 결합했다. 대표 식재료를 패션 상품처럼 단독 쇼케이스에 진열한 것도 특징이다.
입구에는 약 100석 규모의 '아고라' 광장을 조성하고 자연광이 들어오는 중정을 배치했다. 구매하지 않아도 쉬거나 식사하며 머물 수 있도록 설계했다. 회사 발표에 따르면 개장 100일 만에 방문객 40만 명을 기록했다.
다만 트웰브가 속한 건물 전체에는 패션과 리빙, 뷰티, 주류, 다이닝 콘텐츠가 함께 들어가 있다. 따라서 식품만으로 완결된 플랫폼이라기보다 식품을 중심축으로 웰니스와 라이프스타일을 확장한 구조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선행 실험, 고메이494 한남
갤러리아 고메이494 한남은 백화점 건물이 아니라 나인원 한남의 상업시설에 조성된 F&B·리테일 복합 공간이다. 갤러리아는 이곳을 미식에 라이프스타일 콘텐츠를 결합한 '파인 리빙 플랫폼'으로 정의한다.
나인원 한남 상업시설에 조성된 고메이494 한남 — 유럽 구도심의 시장 골목을 연상시키는 공간 설계가 특징이다
약 200m 길이의 지하 공간을 전통적인 층별 매장처럼 나누지 않고, 유럽 구도심의 시장 광장과 골목을 연상시키는 연속 공간으로 설계한 점이 눈에 띈다. 큰 광장은 마켓, 중간 광장은 다이닝, 작은 공간은 팝업과 이벤트에 활용한다.
그러나 오디오와 미술, 리빙 등 비식품 콘텐츠가 포함돼 있고 외부 테넌트의 비중도 높다. 따라서 고메이494 한남은 식품만으로 구성된 공간이라기보다 식품이 공간의 동선과 정체성을 주도한 복합 플랫폼으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다.
규모의 경제, 신세계 강남점 식품관
신세계 강남점은 스위트파크, 하우스오브신세계, 신세계마켓, 델리 전문관을 순차적으로 구축해 약 6,000평 규모의 식품관 체계를 완성했다. 디저트와 외식, 신선식품, 장보기, 즉석조리, 건강식품, 전통주가 각각 전문 콘텐츠로 확장된 구조다.
회사에 따르면 식품관 리뉴얼이 완료된 이후 1년 동안 누적 구매 고객이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셰프 협업 브랜드와 글로벌 델리, 라이브 키친, 단독 메뉴와 팝업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방문 이유를 만들었다.
물리적으로는 여전히 백화점과 센트럴시티 안에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쇼핑몰 구조에서 완전히 독립한 사례라기보다, 식품 콘텐츠가 백화점 내부에서 하나의 거대한 목적지로 성장한 경우에 가깝다.
신선식품의 콘텐츠화, 롯데 '레피세리'
롯데백화점의 레피세리는 2023년 인천점에서 출발한 프리미엄 식료품점 브랜드다. 2026년 3월 문을 연 노원점은 약 550평 규모로, 고객의 구매 주기와 구매 우선순위에 따라 매장 동선을 설계했다.
롯데백화점 프리미엄 식료품점 '레피세리' — 생산자 브랜드화와 건강 기준 큐레이션이 특징이다
우수 생산자를 전면에 내세운 '위드 파머', 건강 기준에 따라 상품을 분류한 '베러 푸드존', 외형에 흠이 있는 과일을 재해석한 '보조개 과일'을 도입했다. 라이브 스시바와 즉석 수산 HMR, 약 170종의 프리미엄 반찬을 갖춘 '한식 아카이브'도 운영한다.
백화점 내부라는 한계는 있지만 산지와 생산자, 고객 데이터, 건강 기준, 현장 제조를 결합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슈퍼마켓이 개인 취향형 신선 미식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디지털 편집 플랫폼, SSG닷컴 '미식관'
SSG닷컴은 2024년 식품 버티컬 전문관 '미식관'을 열고 프리미엄 그로서리와 테마 큐레이션, 온라인 팝업, 숏폼 콘텐츠, AI 기반 개인화를 결합했다. 상품의 품종과 보관법, 조리법을 콘텐츠로 제공하고 검색과 구매 이력, 관심사를 활용해 개인별 상품을 추천하는 구조다.
2025년 개편에서는 이탈리안 식재료, 셰프 협업, 생산자 중심 신선식품, 글로벌 프리미엄, SSG 단독 상품, 친환경 상품 등 여섯 가지 테마를 강화했다. 고객이 직접 투표와 설문, 게시글과 레시피에 참여하는 '미식로그'도 도입했다.
오프라인 건물이 없어도 콘텐츠와 데이터로 편집력을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다만 향과 맛, 제조 과정, 사람과의 대화 같은 현장 경험까지 대체하기는 어렵다.
2023년 SSG푸드마켓 재인수가 말해주는 것
흥미로운 자본 이동도 있다. SSG푸드마켓 청담점은 2012년 백화점의 전통적인 층별 구성에서 벗어난 독립형 프리미엄 슈퍼마켓으로 출발했다.
신세계는 2016년 그룹 내 프리미엄 슈퍼 사업의 운영 주체를 이마트로 일원화하며 SSG푸드마켓과 스타슈퍼 사업을 약 1,297억 원에 넘겼다. 그러나 2023년 8월에는 SSG푸드마켓 청담점과 도곡점의 토지 및 건물을 이마트로부터 1,298억2,500만 원에 다시 양수했다. 당시 신세계가 밝힌 목적은 백화점 프리미엄 식품관 사업의 경쟁력 강화였다.
이후 청담점은 2025년 12월 하우스오브신세계 청담으로 재편됐다. 이 일련의 과정은 프리미엄 식품 사업의 운영 주도권과 핵심 부동산을 다시 백화점 사업에 결합한 장기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식품관이 더 이상 백화점의 부수적인 집객 시설이 아니라, 독립적인 브랜드와 수익 모델을 만들 수 있는 전략 자산으로 재평가받고 있다는 신호다.
미래형 식품 플랫폼의 기업가치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국내 식품관 경쟁은 그동안 유명 맛집과 해외 브랜드를 얼마나 많이 유치하는가에 집중돼 있었다. 하지만 공간이 인기 테넌트의 집합에 머물면 차별성은 임대차 계약 기간만큼만 지속된다. 유명 브랜드가 경쟁사에도 입점하거나 계약을 종료하면 방문 이유도 함께 사라진다.
반면 자체 레시피와 PB, 생산자 공동 브랜드, 콘텐츠 포맷, 회원 데이터는 운영사에 축적된다. 미래형 식품 플랫폼의 기업가치는 매장 면적이나 테넌트 수보다 얼마나 많은 독점 상품과 반복 가능한 콘텐츠를 보유했는가로 평가해야 한다.
성과를 측정하는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신규 공간은 개장 효과와 SNS 화제성으로 단기간에 방문객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초기 방문객 수만으로 플랫폼의 성공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앞으로는 다음과 같은 지표를 함께 봐야 한다.
개장 30일·90일 이후 재방문율
PB와 자체 제조 상품의 매출 비중
시식 후 구매 전환율
현장 구매 고객의 온라인 재주문율
유료 클래스의 반복 참여율
생산 시설 가동률
신선식품과 즉석조리 상품의 폐기율
외부 테넌트와 자체 브랜드 사이의 수익성 차이
사람이 많이 오는 식품관과 반복 가능한 식품 플랫폼을 구분하는 것은 결국 재방문과 독점 상품, 구매 데이터다.
국내형 모델은 한국의 산지와 장인을 연결해야 한다
국내 사업자가 라 그랑드 에피세리를 그대로 옮겨온다면 수입 식품과 유명 맛집을 모은 고가 식품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국내형 모델은 프랑스 미식의 복제가 아니라 한국의 산지와 발효, 제철, 장인, 식문화를 도시 소비자와 연결하는 시스템으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
농가와 어촌, 양조장, 방앗간, 장류·김치 장인을 익명의 납품업체가 아니라 브랜드의 공동 창작자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출발점이다. 매장에는 두부와 떡, 장과 반찬, 면과 디저트를 직접 생산하는 공간을 두고, 제조 과정을 고객에게 공개할 수 있다.
식재료 판매와 레시피, 델리, 레스토랑도 연결해야 한다. 고객이 레스토랑에서 먹은 음식을 델리로 구매하고, 해당 요리에 사용된 소스와 식재료를 집에서 다시 주문할 수 있어야 한다. 방문과 시식, 구매, 배송과 재주문이 하나의 회원 체계 안에서 이어질 때 비로소 공간이 플랫폼으로 전환된다.
매출 구조 역시 임대수수료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PB와 공동 개발 상품, 소규모 생산자 인큐베이팅, 정기구독, 기업 선물, 유료 클래스, 외식, 해외 판매를 결합하면 식품관은 비용이 많이 드는 집객 시설이 아니라 독자적인 수익 플랫폼이 될 수 있다.
물론 위험도 있다. 지나친 프리미엄화는 식품관을 소수 고객의 전시장으로 만들 수 있고, 유명 맛집과 팝업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유행이 바뀔 때마다 콘텐츠를 교체해야 한다. 현장 제조는 위생 관리와 전문 인력 확보에 많은 비용이 들며, 상품 수가 늘수록 재고와 폐기 부담도 커진다. 그래서 비싼 상품만 모은 공간이 아니라 일상 식품, 발견형 상품, 초프리미엄 상품이 함께 있는 가격 사다리를 처음부터 설계해야 한다.
라 그랑드 에피세리가 보여주는 미래
라 그랑드 에피세리가 보여주는 미래는 더 큰 식품관이 아니다. 상품을 판매하던 장소가 콘텐츠를 만들고, 장인을 육성하며, 상품을 직접 생산하고, 고객의 취향을 학습하는 플랫폼으로 바뀌는 미래다.
국내에서는 하우스오브신세계 청담의 트웰브가 공간 구성과 체류 경험 면에서 라 그랑드 에피세리와 비교하기 가장 적합하다. 고메이494 한남은 식품이 주도하는 독립형 복합공간의 가능성을 보여줬고, 신세계 강남점은 규모의 경제, 레피세리는 생산자와 신선식품의 콘텐츠화, SSG닷컴 미식관은 데이터와 디지털 개인화라는 각기 다른 조각을 채우고 있다.
그러나 자체 장인 조직과 현장 생산, 강력한 PB, 레스토랑, 교육, 온라인 판매를 하나의 식품 브랜드 아래 완전히 통합한 국내 대표 플랫폼은 아직 뚜렷하게 자리 잡지 않았다. 바로 그 공백이 앞으로 국내 식품 유통이 채워야 할 자리다.
✦RIT's Insights
RIT가 이 사례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지점은 라 그랑드 에피세리의 경쟁력이 고급 상품의 숫자가 아니라 바이어와 장인, 셰프, 콘텐츠, 유통 채널을 한 브랜드 아래 통합한 조직 구조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국내 백화점들이 최근 식품관에 쏟는 투자는 이 통합 모델을 향해 조금씩 이동하는 신호로 읽힌다. 트웰브는 웰니스 큐레이션과 맞춤형 델리, 체류 공간을 결합했다. 레피세리는 우수 생산자와 식품을 공동 브랜드로 묶고, 신선식품의 제조 과정을 고객 경험으로 바꾸고 있다. 신세계가 2023년 SSG푸드마켓 청담점과 도곡점의 자산을 다시 인수한 것도 프리미엄 식품 사업을 장기적인 핵심 자산으로 판단한 결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현재까지 국내 사례 대부분은 외부 테넌트를 잘 모으는 편집숍 모델의 성격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 입점 브랜드가 아니라 운영사에 남는 자체 생산 기술과 레시피, PB 세계관을 얼마나 확보했는지가 다음 단계의 경쟁을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 MD와 바이어라면 상품을 더 많이 확보하는 경쟁보다 어떤 상품을 왜 들여왔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산지 관계와 콘텐츠에 먼저 투자할 필요가 있다. 공간기획 담당자는 현장 제조와 시식, 클래스를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매장 안의 상시 콘텐츠로 설계해야 한다. 온라인 담당자는 오프라인의 발견과 체험 기능, 온라인의 재구매와 개인화 기능을 구분해 설계하는 편이 두 채널을 동일하게 운영하는 것보다 효율적이다.
RIT가 앞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은 세 가지다. 첫째, 트웰브처럼 백화점 밖에 독립한 식품 중심 플랫폼이 개장 초기 흥행을 넘어 장기적인 재방문율과 자체 상품 매출을 유지하는가. 둘째, 현대백화점과 라 그랑드 에피세리의 협력이 온라인 상품 판매를 넘어 주요 점포의 상설 매장이나 제조·체험 콘텐츠로 확장되는가. 셋째, 국내 유통사 가운데 누가 가장 먼저 자체 생산 조직과 PB 세계관, 외식과 교육, 디지털 재구매를 한 브랜드 안에 결합한 완결형 식품 플랫폼을 만들어내는가.
미래형 식품 플랫폼의 승자는 가장 많은 상품을 가진 유통사가 아닐 것이다. 어떤 음식을 왜 먹어야 하는지 가장 설득력 있게 제안하고, 그 경험을 자체 상품과 반복 구매로 연결하는 브랜드가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